<피에타(2012)> 인간이 된 악마 스크린 밖



 난 오랫동안 로댕의 '지옥의 문' 입구에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 놓여있다고 착각해왔다. 영화를 보고 검색해보니 그건 사실과 달랐다. 단지 '지옥의 문'의 일부분을 조각할 때 로댕이 피에타 상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착각인 줄 몰랐던 착각은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사로잡았다. 내게 강도(이정진 분)와 그의 '엄마'(조민수 분)는 마치 지옥의 문에 빨려 들어가기 직전의 예수와 마리아, 피에타 상 같았다.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은 자본, 돈이다. 강도는 청계천 상가의 금속 노동자들이 진 사채 빚을 받아내는 채권 추심자다. 300만원이었던 사채 빚은 3개월만에 3천만원으로 불어난다. 하루 벌어 먹고 살기도 빠듯한 노동자들이 그 돈을 갚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강도는 그들의 손이나 다리를 잘라 그 보험금을 수령한다. 자살은 금물이다. '죽으면 보험금 수령이 복잡해진다.' 그 때의 강도는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냉혈한처럼 보인다. 손이 잘린 남편을 붙들고 "이 악마!" 라고 소리치는 여자에게 그는 말한다. "돈을 빌려놓고 '설마 죽기야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니들이 더 악마 아닌가?", 빚을 갚을 여력이 없어 자살한 남자의 시체를 바라보며 그는 또 말한다. "이런 책임감 없는 새끼..."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그에게, '30년 전 널 버려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여자가 나타나며 그는 변화한다.

 미켈란젤로가 피에타 상을 조각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지적했다고 한다. '어떻게 아들인 예수보다 어머니인 마리아의 자태가 더 젊고 아름다울 수 있느냐'고. 영화에서도 자신이 30년 전 강도를 버린 엄마라고 주장하는 여자, 조민수에겐 은근한 섹시함이 있다. 우여곡절 끝에 그녀를 자신의 엄마로 인정하는 강도의 사랑 역시 아들과 이성의 경계에 놓여 있다. 그들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모자 관계, 이성 관계, 아니면... 어떤 형태든 간에 엄마에게 최초로 '사랑'이란 감정을 느낀 강도는 그녀에게 묻는다. "돈이 뭐예요?"라고. 마치, 자책하는 듯이. 지금까지 자기가 해왔던 일들의 잔혹함이 이제사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처럼. 그녀는 대답한다. "돈은 모든 것의 시작이자 끝이지. 명예, 복수, 사랑, 죽음."

 익숙함과 낯설음의 경계를 이 영화는 자유롭게 넘나든다. 청계천 노동자들(서민)의 애환, 자본의 잔인성, 모성애 등은 기존 영화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익숙함이다. 익숙함은 동시에 '공감'으로 치환된다. 낯설음 또한 존재한다. 불안정하게 삐걱대는 카메라 앵글과 기괴한(어떤 면에서는 엄숙하고 아름답기도 한) 장면들. 낯설음은 관객에게 '신선함'으로 다가간다. 이 경계 사이의 훌륭한 균형이 영화의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충족하는 주요 요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돈은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 아니다. 어쩌면 시작일 수는 있다. 하지만 끝은 아니다. 복수의 끝은 사랑이었다. 사랑의 끝은 돈이 아니었다. 오히려 '돈으로 시작해서 명예, 복수, 사랑, 죽음으로 끝난다'는 말이 더 맞지 않을까? 감정이 없던 악마는 사랑을 알면서 인간이 된다. 그 순간 악마일 때 행한 그의 행동들이 '죄'라는 이름으로 인간 강도를 짓누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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